
아리 애스터의 장편 데뷔작 *유전(Hereditary)*은 처음 봤을 때보다 보고 나서 며칠이 지난 후에 더 무서운 영화였다. 단순히 ‘깜짝 놀라는’ 공포가 아닌, 알 수 없는 불편함과 잔류하는 공포감, 그리고 인간 본성에 대한 무력감을 남기는 작품. 그 무력감은 단순히 귀신이나 악령 때문이 아니라, 가족이라는 구조, 유전이라는 과학적 개념, 그리고 인간 의지의 허상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이 영화가 '공포영화'라는 장르의 경계를 넘어서 철학적 질문을 던지는 이유다.

1. 줄거리와 겉으로 드러나는 공포의 구조
영화는 애니 그레이엄(토니 콜렛)의 어머니인 엘렌 리의 장례식으로 시작된다. 엘렌은 생전에 비밀스러운 삶을 살았고, 가족과도 단절된 채 지내왔다. 애니는 엘렌과의 관계가 복잡했으며, 장례식에서조차 진심으로 슬퍼하지 못한다. 하지만 엘렌의 죽음 이후 이상한 일들이 가족 안에서 벌어진다. 특히 애니의 딸 찰리(밀리 샤피로)는 다른 세계에 연결된 듯한 기묘한 행동을 보이고, 그 중심에서 점차 가족 전체가 붕괴되기 시작한다.
영화 중반부, 찰리의 죽음 장면은 잊을 수 없다. 공포영화에서 흔히 예상하는 플롯을 뒤틀면서, 관객은 충격에 빠지고 동시에 무언가 비정상적인 세계에 발을 들였다는 것을 직감하게 된다. 찰리의 죽음 이후 아들 피터(알렉스 울프)는 죄책감에 시달리고, 애니는 점점 광기에 휘말려 간다. 이 지점부터 영화는 슬로우버닝 형태로 고조되다가, 마지막 30분 동안 종교적이고 악마적인 비밀을 폭발적으로 드러낸다.

2. '유전'이라는 단어가 말하는 것
영화 제목인 Hereditary는 단순히 유전병이나 혈연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 영화가 말하는 ‘유전’은 단지 생물학적인 개념을 넘어서, ‘피할 수 없는 운명’에 가깝다. 우리는 누구로부터 태어나는가? 우리가 어떤 유전자를 물려받았는가? 그 유전자가 단지 눈동자의 색이나 키뿐 아니라 정신적 결함, 광기, 심지어 영적 속성까지도 전달한다면?
감독 아리 애스터는 인터뷰에서 “이 영화는 가족의 비극에 대한 이야기이며, 인간이 자유의지를 얼마나 가졌는지에 대한 질문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애니는 자신의 엄마가 했던 선택들, 딸에게 일어난 일, 그리고 자신이 저지르는 행동들까지도 통제할 수 없다. 영화의 후반부에서 등장하는 악마 파이몬 숭배 집단은 단지 초자연적 장치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힘’이 인간의 삶을 어떻게 결정짓는가를 상징한다.
찰리는 말 그대로 '다른 존재'였으며, 그 존재는 유전자를 통해 이어졌고, 가족 구성원은 이 유전을 막을 수도 없고, 바꿀 수도 없었다. ‘선택’이 사라진 세계에서, 인간은 그저 도구일 뿐이다.

3. 인형의 집, 구조와 설정의 상징
영화 내내 인형의 집이 중요한 장치로 등장한다. 애니는 미니어처 아티스트로 일하며, 자신이 겪은 사건들을 축소된 모형으로 재현한다. 영화의 오프닝에서 카메라가 실제 인형의 집을 훑다가 한 방 안으로 들어가고, 그것이 피터의 실제 방임을 알게 되는 장면은 상징적이다. 우리는 관찰자이며, 동시에 관찰당하는 존재다.
이 구조는 곧 ‘결정된 세계’라는 테마와 연결된다. 인형의 집 안에서 인형들은 스스로 움직이지 않는다. 누군가가 설정하고, 조작하며, 전시한다. 마찬가지로 영화 속 가족은 자유롭게 행동하는 것 같지만, 결국 누군가의 ‘의지’ 혹은 '의식의 흐름'에 의해 배치된 존재들이다.
이런 설정은 니체가 말한 ‘영원회귀’ 혹은 스피노자의 ‘자연의 필연성’과도 닿아 있다. 인간은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다고 믿지만, 실상은 철저한 인과율에 따라 움직이며, 우리가 그 흐름을 인식하지 못할 뿐이다.

4. 토니 콜렛의 연기와 감정의 지옥
이 영화를 특별하게 만든 가장 큰 요소 중 하나는 토니 콜렛의 연기다. 애니라는 인물은 전형적인 '미친 엄마' 캐릭터가 아니다. 그녀는 처음엔 이성적으로 보이고, 현실적이며, 복잡한 감정을 지닌 인간이다. 하지만 점차 그녀는 자신의 의지로는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상황에 휘말리고, 극한의 감정 상태에 이른다. 딸을 잃은 엄마의 슬픔, 죄책감, 남편에 대한 분노, 그리고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두려움이 콜렛의 얼굴에 오롯이 새겨진다.
그녀의 연기를 보고 있으면, 이 영화가 단지 공포 장르에 머무르지 않고, 오히려 한 편의 비극적인 드라마처럼 느껴진다. 이 점에서 유전은 셰익스피어의 희곡이나 그리스 비극처럼, 인간이 피할 수 없는 운명 앞에서 무너지는 서사에 가깝다.

5. 종교적 해석과 악마 파이몬
영화의 결말에 이르러, 우리는 영화 내내 퍼즐처럼 배치된 단서들을 이해하게 된다. 엘렌은 오컬트 집단의 일원이었으며, 그들은 악마 파이몬을 인간 세계로 소환하고자 했다. 찰리는 파이몬이 깃든 존재였고, 그녀의 죽음 이후 그 정체는 피터에게 옮겨진다. 이는 결국 피터의 자아가 붕괴되고, 그 안에 다른 ‘존재’가 자리하게 되는 것이다.
파이몬은 실제로도 고서 *레메게톤(소로몬의 열쇠)*에 등장하는 악마로, 지식을 관장하고 인간에게 순종을 요구하는 존재다. 영화 속 묘사는 이 고문헌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흥미로운 점은 파이몬이 ‘왕’으로 불리며, 여성을 그릇으로 삼기엔 불완전하다는 설정인데, 이 때문에 찰리는 임시적인 존재였으며, 진짜 '그릇'은 피터였다는 점이다.
이로 인해 영화는 종교적 악마주의와 성별 코드, 육체와 영혼의 관계에 대한 질문도 던진다. 우리는 무엇으로 존재하는가? 우리의 자아는 진정 나의 것인가?

6. 마무리하며: 유전된 공포, 혹은 무력감
영화를 다 보고 나면, 한 가지 감정이 오래 남는다. 공포보다도 더 깊은, 설명하기 어려운 무력감이다. 영화 속 인물들이 점차 자신의 정체성을 잃고, 외부의 힘에 의해 지배당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인간의 자유의지라는 개념 자체에 회의감을 느꼈다. 어쩌면 유전이 가장 무서운 이유는, 이 영화가 진짜 하고 싶은 말이 ‘사탄은 존재한다’가 아니라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자유롭지 않다’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유전은 단순한 공포영화를 넘어선다. 이 영화는 한 가정의 비극을 통해 철학적 질문을 던지고, 관객이 그 질문 앞에서 불편해지기를 요구한다. 다시는 예전처럼 가족을, 혹은 나 자신을 순수하게 믿을 수 없게 되는 그 지점. 바로 거기에 유전이 남긴 공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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